책, 거짓말하는 착한 사람들(The Honest Truth Dishonesty, 우리는 왜 부정행위에 끌리는가?)은 1970년대 케네디예술센터에서 운영하는 선물매장에서 생긴 일을 적고 있다.
조금씩 훔치는 착한 사람들
예술을 사랑해 자원봉사에 나선 수십 명의 선한 노인들은, 선물 매장 년 매출액 40만 달러 가운데 15만 달러의 돈과 물품을 훔쳤다. 어떤 한 사람이 한꺼번에 큰돈을 훔친 게 아니다. 그들 대부분은 스스로를 꽤 착한 사람이라 여기는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조금씩 훔쳤다.
저자 댄 애리얼리는 “이처럼 우리는 아주 조금씩 부정행위를 저지름으로써 부정행위를 통한 이들을 보면서도 아주 조금씩 자기 자신을 합리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대신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규모로 부정행위를 저지르지 않는다. 스스로가 나쁜 사람으로 보이는 것에 저항감을 느끼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p7).
나쁜 생각하는 착한 아빠 이야기다.
여덟 살배기가 학교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온다. 그 아이는 선생님이 보낸 편지를 들고 왔다. 내용은 아이가 짝꿍의 연필을 한 자루 훔쳤다는 것이다. 편지를 본 아버지는 불 같이 화를 내고 외출금지라는 벌을 준다. 얼마 후 아이의 아버지는 말한다. “그런데 얘야, 연필이 필요하면 아빠한테 말하면 되잖아. 그러면 아빠가 회사에서 연필 한 자루가 아니라 몇 다스는 가져다줄 텐데 말이야”(앞의 책 p51)
자신을 근본적으로 선하다고 믿는 사람들
지난 500년 동안 유럽인들은 스스로를 근본적으로 타락한 죄인으로 여겼다. 죄악은 틈만 나면 재발하는 암과 같이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자신들이 근본적으로 선하다고 믿는 경향이 강하다.
충분히 봐줄 수 있을 정도의 사소한 부정행위만 하는데 그친다면
‘착한 사람’ 개념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도덕적인 이미지와 이기적인 여러 욕망 사이의 균형을 맞추려 애쓴다. 이들은 도덕적으로 넘치는 것과 모자라는 것을 다양한 측면에서 관리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인물로 유지하려 노력한다. 충분히 봐줄 수 있을 정도의 사소한 부정행위만 하는데 그친다면, 자신은 일반적으로 착한 사람이며, 그것으로 충분하는 것이다.
착한 일 하는 나쁜 목사와 장로들이 있다.
그들은 때로는 교회 분쟁 해결사이지만 교회를 지켜주고 성도들의 편에 선다. 그들은 끈질긴 협상력과 대화와 타협으로 70세 정년을 지키지 않던 사학법 목사를 물러가게 했다. 그 나쁜 이들은 자신들의 정치력으로 헌법에 맞게 그리고 총회 결의라는 명분으로 일해 나갔다. 그러는 동안 그들은, 자신들의 이미지가 비록 땅에 떨어져 나가는 것은 감내해야 했다. 하지만 여전히 소외되고 억울한 성도들은 착한 일하는 나쁜 정치 목사들을 찾고 있다.
착한 일하는 나쁜 목사들, 악을 도모하는 선한 성도들.
<최성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