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전히 글쓰기 차원이다.
오정현 목사의 책, 『생명축복수업』에서 저자가 서문에 남긴 글이다.
“아브라함은 제 신앙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축복은 모든 신앙인이 소망하는 축복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의 ‘생명 축복 수업’은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이 재해석되고 재서술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의 세 문장이 눈에 거슬린 것은 “할 수 있습니다”이다.
확신이 필요한 글을 객관화시키는 오류를 범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글은 이렇게 고쳐야 한다.
“아브라함은 제 신앙의 고향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축복은 모든 신앙인이 소망하는 축복의 원형입니다”
“저의 책, 생명 축복 수업은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을 재해석하고 재차 기록한 것입니다”라고.
이처럼 글쓰기에서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라는 말은 확신에 찬 글이 객관화되어 글의 힘은 떨어진다. 글을 쓰면서 멋 부리지 말아야 한다.
이번에는 성경해석적 차원이다.
오정현 목사의 책, 『생명축복수업』에서
“인류의 조상인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류는 돌이킬 수 없는 절망과 저주의 역사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이것을 생명의 은혜로 반전 시킨 것은 아브라함의 절대적 순종을 통해서였습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류는 돌이킬 수 없는 절망과 저주의 역사 속으로 빠져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생명의 은혜로 반전시킨 것은 아브라함의 절대적 순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 하나님의 믿음 때문이었다.
75세에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아브라함은 25년 동안 순종과 자기 생각 사이에서 몹시 방황했다. 그리고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바치는 그 순간에서야 비로소 온전한 순종을 보였다.
그러므로 오정현 목사의 글처럼,
아브라함이 처음부터 절대적 순종의 사람은 아니었다. 아브라함의 순종을 강조하면 알미니안이 된다. 그래서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설교한다.
사실, 이런 성경해석의 오류는 많은 목사들에게서 나타나고 있다. 가령 요나서의 요나가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는 요구를 ‘요나의 자기희생’으로 설교하고 또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는 주님의 말씀을 등한시 하고 “뽕나무에 올라야 한다.”고 설교하는 목사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최성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