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지 말라. 아버지는 원도 없이 살았다. 못해 본 것이 머가 있고, 안 해 본 것이 머가 있고, 안 된 것이 머가 있었냐! 나는 여한이 없다”
전북 익산 북일교회 김익신 목사를 만났다. 김익신 목사는 현재 경기도 양주시 장흥에 부인 김경숙 사모와 함께 거주하고 있다. 김익신 목사는 만20년을 시무하고 지난 4월 17일 원로목사가 됐다. 70년 역사의 북일교회 10번째 담임목사 중에서 첫 번째 원로목사이다. 자신의 목회 여정을 잘 마칠 수 있었던 것은 내조 잘한 김경숙 사모의 덕분이라고 자랑했다. 김익신 목사는 스스로를 원 없이 살고, 재미있게 살았던 목회자로 자처하면서, 좋은 교회와 성도들을 만나 행복하게 살았다고 고백한다. 북일교회 당회도 ‘우리 목사님은 우리 교회 목사님만이 아니다’는 마인드를 갖고 김익신 목사를 적극 지원했다. 그런데 총회 활동은 적성에 맞지 않아서 2-3번 총대로 갔을 뿐이다. 하지만 전국은 물론 지역교회와 각 연합회를 위해서라면 헌신과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비록 은퇴했지만 전국교회와 연합회에서 강사로 활동 중이다. |
김익신 목사는 스스로 어떤 목회자로 생각할까?
나는 매우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성격으로 삶을 ‘enjoy’ 즉 즐기며, 누리며 살았다. 그런 가운데 섭섭한 사람도 있어도,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겠지만, 그것이 내 삶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무엇이 힘든 것이 있을까? 생각나지 않고 재미만 있었다. 누가 나를 힘들게 했지? 무엇이 나를 힘들게 했지? 생각하면 어떤 사람이 나오겠지? 그러나 나는 전혀 생각을 안 하고 살았다. 송구영신 예배 설교제목이 ‘된다고 하면 되고, 안 된다고 하면 안 된다’였다. 만사가 안 된다고 하면 안 된다. 된다고 생각하면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말을, 귀에 듣는 대로 행하신다. 그러므로 안 된다고, 못한다는 그런 부정적인 생각을 가질 필요가 없다”
김익신 목사는 연합회에서 강사와 후원을 요청하면 한 번도 거절하지 않는 목회자다. 그러면 김익신 목사는 주로 어떤 메시지를 전할까?
“내 메시지는 주로 ‘전신갑주’와 ‘느헤미야 리더십’이다. 성경에서 예수님 외에 모세, 사도바울도 완벽하지 않았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흠을 찾을 수가 없다. 느헤미야 리더십은 예수님을 예표하는 그리스도인의 리더십이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는데 있어서 많은 도전을 받고, 심지어 생명의 위협도 받았다. 이런 난관에 느헤미야는 인본주의로 헤쳐 나가지 않고 결국 승리한다. 느헤미야의 리더십은 예수님 외에는 없다. 이런 리더십만 있다면 목회자가 실패할 이유가 없다. ‘전신갑주’를 입고 혈과 육과의 싸움이 아니라 하늘의 공중권세 잡은 자들과의 싸움에서 이겨라! 즉 승리하자는 메시지다. 지피지기 백전백승이다. 마귀의 계략을 알면 목회자도 교인들도 이용을 당하지 않는다.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2장 11절에서 사단의 계략을 알았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른다. 어떻게 마귀가 속이고 접근하는지를 몰라. 그래서 당해서 화를 내고,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하면서 마귀에게 놀아난다. 내 안에 사단의 견고한 진이 있어, 그것에게 영향을 받는다. 진정으로 거듭났다면, 마귀의 어떠한 공격에도 이겨낼 수 있다”
약1년 조기은퇴를 하셨다?
2019년 제104회 총회에서 ‘동사목사’를 결의했다. 그때 생각하기를, 정년까지 3년이 남았으니, 앞으로 동사목사와 동역하면서 서서히 은퇴를 준비하면 되겠다고 싶어서 당회에 내놓으니까, 반대를 했다. 그런데 ‘네가 하는 역할을 여기까지이다’라는 하나님의 감동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2019년 12월 연말 당회를 마치고 ‘잘 들으시오. 내가 전에 있던 교회에서 사임할 때도, 전날에 사임을 발표한 목사요. 내 말은 누구도 번복하지 못한다. 2021년 2월에 사임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집에 가서 사모에게도 이 소식을 전했지만, 나를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2020년 10월에 후임 담임목사를 청빙해서 6개월 동안 동사목회를 하다가 2021년 4월에 은퇴했다. 그리고 후임 담임목사를 청빙하는데 일체 관여하지 않았다. 부교역자를 청빙할 때도, 그의 과거, 능력, 스펙을 보지 않고 선발했다. 기준은 단 하나! 가장 먼저 접수시킨 부교역자를 뽑았다. 그리고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 정말 부교역자를 잘 만나서 행복한 목사였다.
내 인생의 새옹지마(塞翁之馬)가 무엇인지? ⓵
이 질문을 받고 깜짝 놀랐다. 이유는 내 삶에 있어 새옹지마는 가장 은혜를 많이 받게 하는 사자성어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예수를 말한 책이다.(요 5:39) 그리고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는 책이다. 그런데 성경을 인생의 삶에 적용하거나 그리스도인들의 실생활에 적용하여 요약한다면 새옹지마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있어 하나님의 주권은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주권적이 섭리를 벗어날 수 없다. 즉 순경도 역경도, 성공과 실패도, 만남과 헤어짐도 하나님의 주권이기에 우리는 우연이라는 단어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서 슬퍼하거나 낙담하거나 주저앉거나 포기하지 않으며 절망하지도, 원망하지도 않는다. 그게 새옹지마의 삶이요. 믿음을 가진 자들의 당연한 삶인데, 그런 믿음의 적용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너무 아쉽다. 믿음의 실제가 보여야 그리스도인이 되기 때문이다.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한다고 약 2:22에서 말씀하고 게시기 때문이다.
내 인생에 있어 새옹지마는 무엇일까? ⓶
인생 1막이었던 결혼까지의 삶인 1975년 이전의 사건들도, 목회자로 부름 받은 인생 2막의 삶인 1976년부터 2021년 은퇴까지의 삶도, 지금 인생 3막의 삶이 새옹지마가 된다. 모든 삶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였기에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시116:12) 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塞翁之馬... 하나님의 사람들은 절대 하나님의 주권을 기억해야 한다. 무엇이 복이고 화가 되는 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기에 교만해서도, 나약해서도 결코 옳지 않다.
내 인생에 있어 새옹지마는 무엇일까? ⓷
3년 전에 일이다. 북일교회에 의사 권사 한 분이 계신다. 파키스탄 선교를 위해 필요한 서류를 떼려고 병원에 갔는데, 피 검사를 했다. 며칠 후, 문자로 결과를 통보받았는데, ‘췌장암’이었다. 그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그런데 새옹지마가 생각났다. 새옹지마의 삶은 어떤 경우에도 적용이 된다.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사용하시는 것 같다’ ‘그러면 얼마 못 살겠네요’ ‘예’ ‘그럼 앞으로 의사로서 좋은 역할을 해 주세요’ ‘예’하고 문자로 대화를 나눴다. 그날이 화요일이었는데, 저녁에 아내에게 ‘어이, 나 췌장암이라네’ 온 가족이 울고불고 난리가 났었다. 간호사 출신의 딸은 큰 병원에 가자고 성화였다. 그때 내가 했던 말이 있었다. ‘울지 말라. 아버지는 원도 없이 살았다. 못해 본 것이 머가 있고, 안 해 본 것이 머가 있고, 안 된 것이 머가 있었냐! 나는 여한이 없다’고 말하고 진정시켰다.
며칠 후 아내가 답답한 마음으로 그 병원을 찾아갔다.
‘사모님. 웬일이세요?’
‘목사님이 췌장임이라면서요?’
‘예? 아닌데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날 나와 같이 피 검사를 한 그 사람이 췌장암 걸렸다고 말한 것이었다. ‘목사님. 그 사람이 췌장암이에요’라는 문자를 잘못 보고 엇박자가 난 것이었다. 수요예배 설교에도 이 소동을 전했더니, 성도들이 이야기 앞부분만 듣고 우는 사람도 있었다. 이때 내가 새옹지마를 체험했다.
왜 은퇴지로 양주인지?
은퇴 후 받은 많은 질문들 가운데 하나이다. 무슨 연고가 있어 양주에 왔나는 등의 궁금증들이 있는 것 같다. 목회자이신 저의 선친의 고향은 평안북도 의주군 고령삭면 영신리이다. 늘 고향을 그리시다가 소천하셨다. 저 또한 남한이 고향이지만 아버지의 고향이 그립고 고향교회가 그립다. 그래서인지 현역 목회자일 때도 휴전선 부근의 여행을 유독 좋아했던 이유다. 심지어 중국에 갈 때도 북쪽 땅을 볼 때마다 가슴이 설렌다. 단동에서 압록강 건너 보이는 산 너머에 선친의 집이 있다기에, 강 건너 산을 바라보며 더욱더 설렜던 경험도 있다.
실제로 북한 통일을 염원하고 통일 후의 사역을 염두에 두었기에 북일교회에서 북한 관련 선교사 두 가정을 파송하여 통일을 대비하고 있다. 통일이, 독일과 같이 갑작스레 올 그 날을 기다리며 문이 열리게 되는 그날 통일로를 따라 제일 먼저 가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어 휴전선 가까운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결정적인 것은 역시 사랑하는 손주들이 멀지 않은 남양주에 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익산 북일교회 김익신 원로목사 추대 및 제11대 이진 위임목사 취임식에서 함께 두 손을 들어 축복하고 있다
우리 교단은 현재 WEA에 가입도 교류도 없습니다. 그린데 WEA와 교류금지 또는 가입 금지를 논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목사님의 고견은?
이 질문을 받고 순간적으로 ‘갈라파고스’가 먼저 떠오름은 왜일까. ‘갈라파고스’란 시대의 상황이나 변화를 고려하지 않고 자기들의 틀이나 방법만 고수하려다가 주변에서 고립되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외부종의 유입으로 고유종이 멸망한 갈라파고스 제도와 비슷하다고 하여 생겨난 말이다.
우리는 당연히 WCC나 WEA는 받아들이거나 가입하는 것은 찬성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보수주의 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의 중간에 포용주의를 표방해서 태어나게 된 신복음주의 신학사상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개혁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분명한 선을 그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교류를 금지하자고 하는 것도 이해는 간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는 신중하게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이다. 신학적인 교류나 연구는 분명 위험한 것이며 타협점은 나올 수가 없다. 하지만 한국의 기독교 안에 있는 조직체들이기에 우리들만으로는 미래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사실 WEA에 관계된 교단들이 대부분일 정도로 많이 있다. 과연 그들과의 그 어떠한 교류도 하지 않고 한국교회의 미래를 펼쳐 나갈 수가 있을까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끊임없이 도전하는 非진리에 맞서 피 흘리기까지 진리의 순수성은 사수하되, 이단으로 단정되지 않는 이상은 신축성 있게 유연하게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해 대처하며 함께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정리해 보며 104회 총회의 결의를 인용해 본다. “WEA가 우리 총회가 지켜오고 추구하는 신학적 입장과 크게 다른 점을 찾아 볼 수 없이 교류 단절은 바람직하지 않다”
부산지역 노회에서 대통령 후보 허경영에 대한 이단 조사 헌의안이 제106회 총회로 올랐습니다. 이에 대한 생각은?
공교롭게도 제가 은퇴 후 정한 거처가 허경영 씨의 하늘궁이 있는 지역이며 바로 저의 집 옆라인에 허경영 씨가 처소로 드나드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의 관한 여러 가지 언행들을 보면서 기인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기도 하였다.
참으로 허무맹랑하다. 우주의 질서를 주장하고 있다며 혹세무민의 역할을 하고 있는 그가 한 때 신학을 잠시 접하기도 하였다는 이력을 볼 수 있었다. 그렇다고 과연 그를 이단으로 정죄할 가치가 있는지에 대하여는 찬성을 할 수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가 교회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며, 기독교의 한 분파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냥 재밌는 사람 정도로 치부하는 게 더 옳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을 피력해 본다. 그러므로 그를 이단으로 보고 조사하는 것보다 목사라는 이름을 가지고 한국교회에 절대적인 악영향을 끼치며 정치적인 노선에서 한 쪽에 치우쳐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며 보수신학을 함부로 난도질하고 있는 사람을 철저하게 이단 조사하여 확실하게 정리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더 시급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