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알라는 다르다-삼위일체 하나님과 단일 신 알라의 차이점- 【2019년 총회이슬람대책위원회 아카데미】 기사입력 2020.12.21 15:00 댓글 0 김영한 교수 (기독교학술원장/샬롬나비상임대표/숭실대 명예교수) V. 지하드의 알라는 사랑의 하나님과 다르다 1. 샤리아(이슬람법)의 알라는 아가페(무조건적 사랑)의 하나님과 다르다 꾸란을 근거로 하는 알라는 성경을 근거로 하는 하나님과는 다른 신이다. 다른 종교들도 그들의 경전을 근거로 신을 말한다. 그렇다고 그들의 신이 성경의 하나님과 같은 존재는 아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과 바나바를 신으로 여기고 제사드리려는 루스드라 사람들 앞에서 옷을 찢으며 그들을 만류했다(행 14장). 신들 중에는 “알지 못하는 신”(Unknown God)까지 만들어 섬기던 아덴 사람들에게 바울은 “너희가 알지 못하는 신을 내가 알게 하겠다”며 창조주 하나님을 소개하였다(행 17:22-25). 반짝인다고 다 금은 아니다. 모든 종교의 신이 다 하나님이라면 삼신할머니도, 인도의 쥐나, 원숭이, 소나 돼지도 다 하나님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다 우상이다. 바울은 오히려 그러한 종교성은 하나님을 바로 찾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행 17:27). 요한네스 바빙크는 족자카르타에서 30년간 선교하고 자유대학교 선교학과를 창설하였는데 그는 이방인들이 열심히 믿는 범신론, 다신론, 자연숭배가 사실은 다 참 하나님을 찾고자 하되 성경을 모르니까 우상숭배를 통해 몸부림치는 발버둥이라고 보았다. 이런 진리를 부인하는 미로슬라브 볼프는 알라와 하나님의 유사성을 정치 신학적 차원에서 동일시하고 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무리한 시도이다. 볼프의 이론은 이미 존 힉(John Hick)이 말한바 “하나님은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종교다원주의 입장이다. 이슬람의 알라와 기독교의 하나님은 같지 않다. 볼프와 달리 카톨릭 추기경이자 보수파 수장인 미국인 레이몬드 버크 (Raymond L. Burke) 사제는 2016년 8월 자신의 신간과 관련된 8월 원격 화상회의에서 "일부 사람들은 크리스천과 무슬림들이 같은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천명한 것은 종교다원주의를 수용하는 로마 카톨릭 추기경의 선언으로 주목할 만하다. 버크는 "이슬람의 신은 통치자이기 때문에 알라와 하나님은 다르다"면서 "알라로부터 나온 샤리아 법(이슬람법)은 그 신이 실제로 모든 사람을 지배해야 한다고 믿는다"고 했다. 버크는 "이슬람의 신은 통치자이기 때문에 알라와 하나님은 다르다"면서 "알라로부터 나온 샤리아 법(이슬람법)은 그 신이 실제로 모든 사람을 지배해야 한다고 믿는다"고 했다. "알라와 반대로 하나님은 '계시의 공급자'이시고, 그분의 법은 우리의 마음에 새겨진다. 그리고 우리는 그 법을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신적인 은총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하나님의 가르침이 이슬람에서는 맞지 않다. 그래서 크리스천의 하나님과 무슬림의 알라가 똑같다고 주장할 수 없다"면서 "샤리아법이 사랑에 기초했다고 믿지 않기 때문에, 크리스천과 무슬림이 둘 다 사랑을 믿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단순하고 맞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버크의 입장은 역사적 교회와 성경의 입장을 대변하는 올바른 견해이다. 이러한 성직자들이 가톨릭교회 안에 있기 때문에 가톨릭의 기독교 정체성이 유지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 알라는 지하드(Jihad, 聖戰)를 명령한다. 알라는 비무슬림들과 성전(聖戰)을 명령한다. 무슬림을 이슬람교에서 떠나게 하는 자는 그 자리에서 포획하거나 살해하라고 가르친다. “..그럼에도 그들이 배반한다면 그들을 포획하고 그들을 발견하는대로 살해할 것이며, 친구나 후원자를 찾지 말라”(Sura 4:89). 특별히 기독교인들과 유대교인들은 무슬림들을 배신자로 만드는 자로서(Sura 3:100) 살해 대상이 됨을 시사한다. 기독교인이나 유대인들이 이슬람을 받아드리지 않는다면 그들은 최악의 피조물이며 지옥행이 된다고 한다(Sura 98:6). 그리고 비 무슬림들과 싸워서 무슬림들의 엄격함을 보여주라고 한다(Sura 9:123). 박해가 없어지고 종교가 단지 알라를 위한 것이 될 때까지 성전(聖戰)을 치루라고 한다(Sura 8:39; 22:78; 8:12; 47:4; 9:29; 4:89; 61:11,12). 알라는 성전(聖戰)으로 인한 죽음을 사랑하고(Sura 61:1) 이것을 위대한 승리로 여긴다(Sura 61:11, 12). 성전으로 죽은 자들은 죄 사함을 받으며 천국에서 눈이 크고 아름다운 배우자들과 함께 살게 한다. “그들은 한번의 죽음 외에는 다시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며, 하나님은 타오르는 불지옥의 벌로부터 그들을 보호하여 주시리라”(Sura 44:56). “그들 주위에는 순결한 여성들이 있나니 그녀의 눈은 잘 보호되었고, 눈은 크고 아름다우매, 마치 잘 보호받은 달걀과 같더라”(Sura 37:48-49, 그리고 Sura 44:54-55; Sura 52:20; Sura 56:37). 그들에게 살인은 정당하다(Sura 8:17; 3:157-158, 195). 금지된 달(the sacred months: 살생이 금지된 거룩한 달)이 지나면 불신자들(the idolaters)을 죽이라고 명한다. “금지된 날이 지나면 너희가 발견하는 불신자들마다 살해하고 그들을 포로로 잡거나 그들을 포위할 것이며 그들에 대비하여 복병하라”(Sura 9:5). 일상에서 그들이 어느 순간에라도 잔인한 모습으로 돌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해주는 부분이다. 3. 성경의 하나님은 십자가에 아들을 피 흘려 죽게 해 인류의 대속자가 되게 하셨다. 성경의 하나님은 아들 예수로 하여금 이 세상의 죄를 대속하는 독생자가 되게 하셨다. 하나님은 그에게 불순종하는 인류를 위하여 그 아들을 주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17). 예수의 메시아상은 무력으로 예루살렘을 정복하는 전쟁의 메시야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대속자였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막 10:33-34; 마 20:18-19; 눅 18:33-34).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서 예수는 자기를 처형하는 자들을 위하여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신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예수는 산상 설교에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 5:43-45). 이러한 예수의 사랑은 바로 그가 증거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원수를 갚지 않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4. 지하드가 아니라 에렌틱스(사랑의 친교 가운데서 내면적으로 우러나오는 죄 확신 인도) 실천 하나님은 지하드(聖戰)를 명령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우리에게 대속제물로 주셨고,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복음의 진리로 영혼들을 구원하기 원하신다. 성경은 무력이 아닌 사랑과 은혜의 복음으로 죄인을 구원하고자 한다. 그리고 성경은 신자가 비기독교인들과 인격적으로 만남을 촉구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만을 전하면서 죄를 지어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엘렌틱스(Elentics)를 실천하라고 한다. 그것은 사랑과 우정 어린 친교 가운데서 내면적으로 우러나오는 죄의 각성과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다. 이는 불신자 속에 있는 죄의 가면을 벗기고 죄를 확신시키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 종교 다원주의자들은 기독교의 본질은 사랑이니 인자와 자비를 말하는 불교와 유교와 다름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의 사랑만을 말하고 하나님의 다른 면, 그분의 거룩성, 불의와 죄에 대한 그분의 진노와 심판을 놓치고 있다. 맺는말 이슬람이란 알라의 명령에 절대복종하고 알라의 명령에 따라서 행동함을 말한다. 무슬림은 이슬람 교리를 순종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러한 무슬림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법을 인격적으로 순종하는 기독교인과는 다르다. 무슬림은 알라에 대하여 율법적인 관계를 가지나 기독교인은 하나님에 대하여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격적인 관계를 가진다. 이슬람은 알라에 대한 완전한 믿음과 절대복종을 말하나, 패역하는 인간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독생자를 주시는 하나님의 대속의 사랑을 알지 못한다. 이슬람은 예수를 단지 “알라의 선지자”, “창조된 말씀” 내지 “인간적으로 활동하는 알라의 창조된 영”으로 격하시켜 버리고 있다. 이슬람과 기독교의 차이는 그 종교의 창시자인 무함마드와 예수의 차이다. 무함마드는 10명의 아내를 거느리고 실수와 허물이 너무나 많고 그 행위에 모순이 많은 인간이었으나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실수와 허물이 없으며 우리를 위해 대속자가 되신 구세주이다. 무함마드는 이슬람이라는 법을 주었으나 예수는 구세주라는 인격을 우리에게 주셨다. 무함마드는 원수를 증오하고 보복하고 살해하려고 가르치나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고 보복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라고 가르친다. 여기서 우리는 이슬람의 윤리보다 차원 높은 기독교의 윤리의 우월성을 발견한다. <저작권자ⓒ합동기독신문 & ikidok.com 무단전재-재배포금지. > BEST 뉴스 위로 목록 댓글 작성을 위해 로그인 해주세요. 등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