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창중앙교회 김원선 목사는 필리핀 민다나오 다바오의 DVC대학교를 세우고는, 돈 없이도 공부할 수 있는 학교로 만들어갔다.
새옹지마(塞翁之馬)는 인생의 길흉화복은 변화가 많아 예측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이야기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옛날에 중국 북쪽 변방에 사는 노인이 기르던 말이 오랑캐 땅으로 달아나 낙심했다. 그런데 얼마 뒤에 그 말이 한 필의 준마를 데리고 와서 노인이 좋아했다. 이후 그 노인의 아들이 그 말을 타다가 말에서 떨어져 다리를 저는 장애가 생겨서 다시 낙담했다. 하지만 그 일 때문에 아들은 전쟁에 나가지 않고 목숨을 구하게 되어 노인이 다시 기뻐했다는 고사(故事)이다”
김원선 목사는 지난 5월 23일, 42년 목회를 은퇴하고 원로목사가 됐다.
얼마나 가난했던지, 고등학교 때까지 하루 세끼를 먹지 못했습니다. 쌀밥은 구경도 못했고, 하루 세끼를 고구마, 보리밥, 무밥으로 견뎠습니다. 그러나 그 가난 때문에 좋은 스승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스승님이 바로 평교교회 이은익 목사님, 한국성서대학교 강태국 박사님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감사하며 살 수 있기 때문에 그 가난이 제 인생의 첫 번째 새옹지마입니다.
백산중앙교회(평교교회)
처음에는 우리 누나도 통일교인줄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제가 중3학년 마지막 학기 때입니다. 통일교 선생님들이 우리 집을 심방 왔습니다. 자연스럽게 그들과 대화가 이어졌고, 통일교임을 알았습니다.
그때 제가 비록 중학생이었지만 당시 평교교회(지금은 백산중앙교회)주일학교 교사요, 전서노회 성경고등학교에서 3년 동안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이미 대선지서와 소선지서, 모세오경과 삼위일체 그리고 4복음서와 바울서신을 배웠습니다. 통일교가 이단인 것도 배운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중학교 3학년인 제가 당당하게 밀리지 않고 통일교 교사들과 상당한 시간을 토론했습니다.
얼마 후 통일교 본부에서 다시 저의 부모님을 찾아와서는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동안에만 통일교교육을 받는 조건으로 전액 고등학교 장학금을 주겠다는 제안을 해 왔습니다. 당시 통일교에 대해 전혀 몰랐던 부모님은 기쁨으로 그들의 제안을 승낙했습니다.
만약 통일교가 저에게 추천한 부안농고에 합격했다면,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동안에 꼼짝없이 통일교 교육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저는 통일교 교인을 넘어 지도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안농고’에 불합격한 것이 저의 두 번째 새옹지마였습니다.
김원선 목사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호소한다. 누가 오늘날 대학수학능력입학 시험에 떨어진 학생들을 위로할 수 있겠는가? 도저히 떨어질 수 없는 실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부안농고’에 떨어진 바로 김원선 목사가 위로하고 격려한다.
“네가 열심히 하고도 떨어졌다면, 그것은 새로운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열심히 최선을 다하지 못하고 떨어졌다면 회개하고 다시 도전하라. 기억할 것은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특히 김원선 목사는 “자랑할 것이 없는 제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다. 이 실패가 바로 저에게 또 하나의 인생 새옹지마입니다”
어느 날 점심을 먹으면서 이은익 목사님께서 공부해야 할 학생이 교회에 와서 일만 하고 있다고 하시면서, ‘저 학생이 누구냐?’고, 고사촌이신 박병옥 집사님께 물었습니다. 제 사정을 들으신 이은익 목사님께서는 그날로 자전거를 타시고 저의 집을 심방하셨습니다. 그리고 부모님들을 설득시키셔서, 돈이 없어도 학교에서 먹고 자며 공부할 수 있도록 고등학교 소사로 일하면서 공부하게 하셨습니다.
현재 염창중앙교회는 사찰이 없습니다. 사찰 대신에 필리핀 DVC 학생들이 유학을 와서 교회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DVC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학생을 선발해서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를 다니면서 교회에서 일합니다. 그 학생들이 사찰 월급을 받고 또 장학금도 받습니다. 국제신학교대학원대학교도 이에 협조하고 있습니다. 필리핀 유학생이 받는 월급 은 필리핀 DVC 총장 월급보다 많습니다. 이 얼마나 훌륭한 선교 전략적입니까? 이것은 또 돈이 없어도 공부할 수 있게 하신 이은익 목사님과 강태국 목사님의 가르침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저는 평생을 철저한 호남인으로 살았습니다. 제 스스로 호남인의 옷을 입고 나 자신을 관리했습니다. 호남인이 욕을 먹지 않고, 예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기 위해서 저는 내 자신을 쳐 복종시키는 도구로 ‘나는 호남인입니다. 나는 예수쟁입니다’라는 정체성을 갖고 살았습니다. 때로 제 부친의 고향을 아는 사람들이 ‘당신은 이북사람인데 왜 고향이 전라도냐?’고 하면,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는 이북은 잘 모르고 오직 전라도만 압니다’ 그러므로 저는 교회에서 ‘고향’ ‘학벌’ ‘직업’을 묻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전라도에서 태어난 것이 또 하나의 인생 새옹지마였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결코 나 자신을 이길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제가 어느 정도 가져본 후에야 복음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면, 제가 저를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실족을 당해도, 실족을 시켜도 화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목사가 되면 다른 사람을 실족시킬 확률이 훨씬 더 높습니다. 실족시킬 일을 왜 하겠습니까? 그래서 성서대학교에서 성서과 대신에 사회복지학(당시 지역사회개발과)를 선택했습니다. 주님께서 쓰신다면 언제나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되기 위한 신학까지 복수 전공했습니다.
제대 후 진로를 위해 3월 불광동 연신내 산속 우국기도원에 올라갔습니다. 사생결단하고 밤을 세워가며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들려오는 음성이 하나 있었습니다. ‘나는 너를 여기까지 인도했다. 그런데 너는 너 가고 싶은 곳으로 가겠다?’ 그렇게 꼼짝없이 두 손 들고 산을 내려왔습니다. 그때 마포은석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하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때가 목요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당시 엄영달 국회의원 작은 어머니가 소천하였습니다. 그 장례를 도와야했습니다.
김원선 목사는 지난 5월 23일, 42년 목회를 은퇴하고 원로목사가 됐다.
배 목사님의 고향이 인천 옹진 영흥도였습니다. 그동안 자신의 고향에 교회가 세워지길 기도해 왔다고 했습니다. 저는 돌아오는 주일에 약속대로 마포은석교회에 가서 설교를 하기 전 서춘웅 목사님에게 교회개척 계획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자 서 목사님께서 기쁨으로 허락해 주시면서 ‘우리 교회는 전도사를 얼마든지 구할 수 있지만 교회도 없는 섬에 누가 가겠는가? 내가 가지 말라 하면 하나님께 책망 들을 일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일을 보낸 그 다음날, 월요일에 영흥도를 방문하고 천막을 치고 영흥교회(현재 내오리교회)를 시작했습니다. 당시 하나님의 은혜로 청년들이 한꺼번에 12명이 회개하며 등록하여 건축을 도왔습니다. 그때 모범적인 박창규 장로님 가족을 만날 수 있었고, 교회 개척 만1년 만에 45명의 교인들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변수가 생겼습니다. 영흥교회 부지를 배 목사님의 개인 명의로 해 달라는 것이 아닙니까? 지금 같으면 방법이 있었을 것이지만 당시는 그리 할 수 없기에 그만 사표를 내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고생이 따라왔습니다.
그러나 장00 목사께서 서울 을지로에서 개척한 교회 부목사로 부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는 이제 곧 폐쇄하려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 교회에 부임한 지 1년 만에 98명의 성도들로 부흥시켰지만, 또 사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교인들에게 어려움을 당한 적은 별로 없습니다. 대신 선배 목회자들의 많은 훈련을 견뎌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선배 목회자들을 통해 저를 훈련시키신 후에 염창중앙교회를 개척하게 하셨고 만42년을 섬기게 하신 후 원로목사가 되게 하셨다. 이 모든 훈련이 또 하나의 제 인생의 새옹지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