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나그네 이종찬 글】 난파선이 되어서는 안된다 기사입력 2021.02.21 15:50 댓글 0 이종찬 목사(교회사 PhD) 우리는 1975년 4월 30일 월맹에 의하여 멸망한 자유월남을 기억한다. 패망 당시 세계 4대 군사 강국이었던 자유월남은 거렁뱅이나 다름없는 공산 월맹군에게 내준 티우의 통치기간을 우리의 현실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불쾌하지만 패망 당시의 자유월남과 같아 불안하기 그지없다. 월남이 패망할 당시 자유월남은 미군이 보유하고 있던 각종 최신무기를 양도받아 월남 공군력은 전 세계 4위의 막강 전투력이었다. 당시의 월남 상황에 대하여 키신저는 주월미군이 철수하더라도 휴전체제가 최소한 10년을 갈 것이라고 낙관했다. 베트남전이 휴전을 맞으면서 전 세계에는 평화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당시 월남의 총인구 90.5%는 월남이 지배하고 있었고, 나머지 5%는 낮에는 월남 밤에는 베트공이 지배하는 지역에다 나머지 4.5%는 공산측이 지배하고 있었다. 1973년 1월 27일 휴전이 될 무렵 월맹은 오랜 기간의 전쟁으로 매년 80-100만 톤의 식량이 부족한데다 물자 부족은 극에 달할 정도였다. 이러한 때 숱한 공산당 프락치들이 월남 곳곳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웬후토가 1962년 1월에 창당한 인민혁명당에서 침투시킨 요원들이었다. 월남이 월맹에 의하여 무너질 당시 월남에는 공산당원 9,500명과 인민혁명당원 4만 명 등 전체 인구의 0.5%가 월남사회의 지하에서 뿌리를 흔들고 있었다. 1969년 6월 6일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베트남 임시혁명정부로 개편될 당시 월남정부의 각 부처와 월남군 총사령부에서 이루어지는 극비 회의 내용이 단 하루면 보고될 정도로 티우 정권의 핵심에는 공산 프락치가 침투해 있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1967년 대선당시 차점으로 낙선된 쭝딘쥬와 당시 모범적인 관료로 존경받던 도지사 녹따오 등의 많은 정치인들이 공산 프락치였음이 알려진 것은 월남 패망 후의 일이었다. 휴전 협정이 체결된 후 미군과 한국군이 철수하자 사이공은 100여개의 애국 단체와 통일 운동 단체들이 수십 개의 언론사를 양산하여 월남의 좌경화에 앞장섰다. 목사, 승려, 학생과 좌익 인사들은 한데 뒤섞여 반전운동은 물론이고 인도주의 운동과 순화운동 등으로 티우 정권 타도를 외치고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1975년 패망할 당시의 월남은 100여개가 넘는 좌익 단체에 의해 유린당하고 있었다. 지금 이 나라의 모습은 온갖 미사여구로 무장한 잘못된 인사들에게 무차별 공격을 당하고 있다. 월남이 패망할 당시 말 없는 다수의 모습은 지금 이 사회의 모습과 흡사하다. 당시 월맹은 전차부대를 제외하고 군화를 신은 군인들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저들은 타이어를 잘라 끈으로 묶은 채 끌고 다니며 전투했다. 이런 군대가 최신무기로 완전무장한 월남 군대를 붕괴시켰다. 1975년 4월 30일 군사력과 경제력에 압도적이라던 월남은 월맹군에 의하여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가여운 나라가 되었다. 분열과 선동 속에서 좌익들에게 유린당한 채 평화에 눈이 먼 월남 지도층은 참혹한 몰락 앞에서 사라져갔다. 그리고 저 유명한 106만의 보트 피플은 11만 명이 바다에서 유명을 달리했고, 살아서 해외로 이주된 사람이 95만 명이었다. 월남이 패망할 때 미국이 강대국들까지 동원하여 맺은 방위조약은 휴지 조각에 불과하였다. 우리 모두 기도하자 사랑하는 우리의 조국이 난파선이 되지 않기를 위해서 말이다. <저작권자ⓒ합동기독신문 & ikidok.com 무단전재-재배포금지. > BEST 뉴스 위로 목록 댓글 작성을 위해 로그인 해주세요. 등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