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대책 아카데미】 난민에 대한 문제와 한국교회의 과제 성남용 목사(총신대목회신학전문대학원, 선교학 교수) 기사입력 2020.07.20 22:21 댓글 0 【이슬람대책 아카데미】 난민에 대한 문제와 한국교회의 과제 성남용 목사(총신대목회신학전문대학원, 선교학 교수) 21세기를 신유목민 시대(New Nomadic era)라 한다. 태어난 곳이 아닌 다른 지역에 거주하는 이주민들이 많아지고 있다. 한국인들도 현재 7백만여 명이 176개국에 살고 있다. 국내에도 많은 외국인이 이주하여 살고 있다. 여행, 결혼, 취업, 유학 등의 이유로 입국해 살고 있다. 전쟁과 테러 등을 피하여 이주하는 난민들도 많다. 난민 문제는 우리나라에서도 큰 논쟁거리가 되었다. 2세기부터 시작되어 4세기까지 계속된 훈족과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과 비교될 정도로, 오늘날 거대한 무슬림 난민들이 이동하고 있다. 로마제국은 방관하다가 큰 어려움을 당했다. 나라별로 또는 유엔 차원에서 이들에 대한 이주 대책이 논의되고 있다. 한국교회가 이들에 대한 선교적 대응방안을 논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1. 이슬람과 무슬림 우리의 무슬림에 대한 이해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테러, 여성할례, 폭력, 무질서, 혼란, 난민 등이 그들과 연관되어 떠오르는 단어들이다. 주로 부정적인 뉴스를 통해서 무슬림들을 만나고 있다. 따라서 직접적인 접촉을 피하려 한다. 부정적인 영향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무슬림들을 잔악한 테러리스트라고 하면, 대다수 무슬림들은 억울해 한다. 그들은 이슬람을 평화의 종교라 하며, 무슬림들을 평화를 지향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이슬람과 무슬림의 어원적 분석을 할 필요가 있다. 이슬람이란 복종이나 순종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알라에게 복종하거나 순종하는 종교다. 다른 말로 하면, 아랍어 알파벳 ‘신.람.밈’을 뿌리로 세워진 종교다. 히브리어 알파벳 ‘신.라멕.멤’과 같다. 히브리어나 아랍어는 뿌리가 같아서 3음절 단어가 기본이다. 그 위에 접두어(prefix)나 접미어(suffix)를 붙이거나, 독립된 단어들을 서로 연결시켜 새로운 단어를 만든다. 그런데 아랍어에서 ‘신.람.밈’이 들어간 단어는 대체로 평화와 연관된 단어들이다. 히브리어도 마찬가지다. 샬롬이나 예루살렘 같은 단어들이 모두 여기에 뿌리를 둔 단어들이다. 그리고 아랍어 단어 앞에 무(Mu)자가 붙어 있으면 대체로 그 단어를 행하는 사람이란 뜻을 갖는다. 그러니까 무슬림이란 이슬람을 행하는 사람들이다. 마찬가지로 지하드(성전)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무자히딘(Mujahideen)이라 부르고, 기도하는 사람은 무쌀리(Musali)라 부른다. 따라서 무슬림들이 이슬람을 평화의 종교라 하는 것은 어원론(etymology)에 따른 것이다. 우리가 이를 부인할 필요는 없다. 그 평화를 폭력적으로 이루려는 사람들이 있다. 꾸란과 하디스, 그리고 이슬람의 역사에도 그런 폭력성이 들어 있다. 하지만 보통 무슬림들은 테러를 행하는 소수의 극단주의자들을 부끄러워한다. 우리의 무슬림에 대한 이해와 무슬림들의 자신들에 대한 이해에는 간극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그들의 태도 역시 심하게 왜곡되어 있다. 이런 인식의 차이와 왜곡에 대한 객관적인 진단과 처방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현재 국내 거주 무슬림들은 얼마나 될까? 25만, 40만, 백만... 진실은? 현재 무슬림들의 영향력은 얼마나 클까? 누가 이슬람 관련 괴담을 유포하고 있을까? 2. 잦아지는 무슬림과의 접촉 2017년 현재 세계에 2,250만 명의 난민이 있다. 2017년 상반기에만 130만 명 이상이 고국을 떠났다. 2014년에만 지중해에서 3,500여 명이 익사했다. 22만여 명이 유럽의 해안 국가들에 의해 구출되었다. 지중해는 난민들의 수중 무덤이 되었다. 매해 수십만 명이 유럽으로 가기 위해 지중해를 건너고 있다. 지중해 루트가 위험해지자, 터키를 통해 유럽으로 들어가는 발칸 루트에도 난민들이 몰리고 있다. 난민의 대부분은 무슬림들이다. 그들이 속한 이슬람국가들이 내전이나 사회경제적 혼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다수의 무슬림들은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낙후된 지역에 살고 있다. 난민들이 발생한 지역도 대부분 이슬람지역들이다. 하지만 언제나 이랬던 것은 아니었다. 1683년의 비엔나전투에서의 패배를 쇠락의 기점으로 잡는다면, 그들은 7세기부터 17세기까지 무려 천년 동안 지중해권역을 지배했었다. 경제적으로도 1000년대의 유럽이 세계 경제의 9%를 생산했을 때 그들은 10%를 생산했었다(Schumpeter 2011). 현재는 역전되어 유럽의 22%에 비해 그들은 2%밖에 생산하지 못한다. 일인당 소득 수준도 유럽과 미국의 28%밖에 되지 않는다. 현재의 국경선도 대부분 유럽인들에 의해 확정되었다. 하지만 흥왕했던 때도 있었다. 세계 최초의 대학이 그곳에서 시작되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많은 단어들도 이슬람 지역에서 왔다. 대수(algebra), 지수(exponent), 소수(decimal fraction), 미적분(calculus) 뿐만 아니라 숫자체계도 그곳에서 왔다. 우리가 사용하는 숫자가 아라비아 숫자다. 현대의학의 수술도 그곳에서 유래했다. 바울이 개종하자마자 간곳이 바로 아라비아 땅이었다. 그의 마음이 아랍인들에게 있었음을 암시한다. 3. 무슬림 세계에 부는 새로운 바람 무슬림 난민들은 믿고 있던 이슬람교에 대해 회의하면서 고향을 떠나고 있다. 난민들에게 성경을 주었더니, 성경에 입을 맞추고 운 사람들도 있었다는 보고가 있다. 지금 이슬람의 집에 성령의 바람이 불고 있다. 데이빗 게리슨(Garrison 2014)은 ‘A Wind in the House of Islam’에서 아랍의 봄 이후 이슬람 지역에 불고 있는 성령의 바람을 언급하고 있다. 그의 보고는 놀라울 정도로 고무적이다. 그에 따르면 이슬람이 발흥하기 시작한 7세기 때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천명 이상의 집단개종 운동이 3번 보고되었다. 하지만 20세기 말에 11번, 21세기에 들어서서 벌써 69번 이상이 보고 되었다. 그러니까 최소한 7만 명 이상이 14년 동안 개종이 보고된 것이다. 이슬람적 세계관에 의심을 품고 유럽으로 넘어오는 난민들도 많다.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새로운 질서를 갈망하는 무슬림들이 많아지고 있다. 영적 공허감을 느끼는 무슬림들도 많다. 자발적으로 복음을 찾아 나섰던 구한말의 우리 조상들과 같다. 우리 옆의 무슬림들도 지금 흔들리고 있다. 희어져 추수하게 된 밭이다. 그들은 준비되어 있다. 문제는 우리가 준비되어 있느냐다. 오순절 제자들은 성령 강림을 체험하고 예루살렘과 유다, 그리고 사마리아와 땅 끝을 변화시켰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성령으로 충만하게 준비되어 있으면 이 거대한 영적 추수기에 많은 열매를 주께 올려 드릴 수 있다. 성령 충만하여 성령의 역사에 함께 참여해야 한다. 2015년 요르단에서 있었던 난민사역자 모임에서 한 사역자는 현재 독일에는 200여개의 자생적 난민교회가 생겼다고 보고했다. 4. 한국교회의 과제와 책임 테러에 참여하는 극단주의적 무슬림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다수는 평화를 사랑한다. 그들은 이슬람을 그런 종교로 믿고 싶어 하고, 그런 무슬림이 되고 싶어 한다. 폭력을 권장하는 꾸란 구절마저도 평화를 가리키는 가르침을 통해서 해석하려 한다. 그리고 이슬람 지역에는 이웃을 환대하는 문화가 있다. 이웃과 스스럼없이 어울렸던 무함마드의 삶이 그런 문화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꾸란과 하디스에는 손님 접대에 탁월함을 보였다는 무함마드의 삶에 대한 에피소드가 많다. 무함마드는 그의 집을 수시로 방문했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남겼다. 손님 접대의 중요성에 관한 가르침이 많다(꾸란59:9). 1) 만나고 교제해야 한다. 지금 우리 옆에 무슬림들이 노동자와 난민, 그리고 여행자와 학생 등으로 와 있지만, 우리는 그들과 만남 자체를 꺼린다. 하지만 만남이 없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는다(롬10:13). 하지만 전파하는 사람이 없으면, 믿을 수 없고, 믿지 않으면 부를 수 없다(롬10:14-15). 그러므로 보내고 가서 만나야 한다. 만남 없이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 하나님은 무슬림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우리 하나님의 소원이 바로 우리의 소원이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이 구원받기를 소원했었다. 그들은 하나님께 열심이 있었다. 하지만 올바른 지식에 따른 열심이 아니었다(롬10:2). 무슬림들도 그렇다. 그들도 하나님을 열심히 사랑한다. 하지만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게 아니다. 잘못된 가르침에 복종한다.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전해줄 기회를 찾기 위해서라도, 바울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만나고 교제해야 한다. 2) 길을 만들어야 한다. 언론의 자유, 신앙의 자유, 공포와 궁핍으로부터의 자유는 1948년 12월 국제연합총회에서 가결한 세계인권선언에 들어있다. 가맹국들이 따라야 할 법적의무는 없지만,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세계인들이라면 이를 따를 도덕적 의무가 있다. 이 기본권은 양심의 자유 위에 세워졌다. 하지만 이슬람의 기본교리가 위의 천부적 인권선언과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구공동체의 일원으로 그들이 위의 가치들을 존중하도록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권고해야 한다. 물론 꾸란의 가르침에 역행하도록 하는 권고다. 그래서 저항도 따른다. 하지만 위의 공동가치는 지구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일임을 무슬림들도 알고 있다. 이슬람권에서 반인권적 법규들이 실행되지 않고, 종교의 자유가 확대되고 있는 이유다. 물론 지난한 일이다. 쉽게 변할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기도하면서 이런 변화들이 일어나도록 힘을 다해야 한다. 산을 깎고 골짜기를 메워서라도 길을 만들어야 한다(사40:3-5). 그들로 하여금 여호와의 영광을 볼 수 있게 해야 한다. 우리 옆에서 이런 가치를 몸과 마음으로 체험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노아는 120년 동안 겨우 여덟 명만 구원했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그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우리도 열매가 없다고 실망하지 말아야 한다. 대신 거룩함과 온유함, 그리고 존경심과 사랑으로 그들을 만나야 한다. 그러면 그들은 우리가 가진 소망의 이유를 물으며 복음에 귀를 열 것이다(벧전3:15). 어찌하든지 그들이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진리에 갈증을 느끼게 해야 한다. 3) 변화를 일으키게 해야 한다. 무슬림들이 질문을 받으면 난처해하는 질문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배교자를 죽이라는 꾸란의 가르침이다. 그동안 많은 무슬림들의 답을 들어봤지만 이 문제에 대해 자신 있게 답하는 이를 본 적이 없다. 물론 테러행위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극단주의자들은 다르다. 하지만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이 질문에 답을 하지 않으려 한다. 당시 상황을 이야기하며 꾸란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말하는 무슬림들이 많다. 또 다른 질문은 9세 여아와 결혼한 무함마드의 삶에 대한 질문이다. 대부분은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한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니 따를 필요가 없다고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서, 무슬림들이 다수인 감비아에서는 18세 이하 소녀들의 결혼을 금지하는 대통령령을 공포하기도 했다. 이렇게 꾸란과 하디스의 가르침을 새롭게 해석하려는 무슬림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런데 이런 질문 자체가 종교적 편견과 악감정에서 나온 것이라며 분노하는 무슬림들도 있다. 이와 유사한 질문을 받은 한 이맘은 저 꾸란의 가르침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무슬림은 1%도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자신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꾸란의 가르침이며, 무함마드의 삶이었다. 꾸란을 신학화 하는 중에 꾸란의 가르침과 이슬람에 대해 회의하는 무슬림들이 많아질 것이다. 꾸란과 관계없는 무슬림들도 더 많아질 것이다. 꾸란과 하디스를 현대 문명에 맞게 해석하려 할 것이다. 패러다임의 변화는 이렇게 일어난다. 이렇게 이슬람은 변화할 것이다. 현대화된 이슬람을 주장하는 무슬림들은 강압적인 개종을 금한다는 꾸란의 가르침을 강조한다(꾸란13:11). 그러면서 강제 개종이나 폭력을 권장하는 꾸란 구절들을 보다 덜 폭력적으로 해석하려고 한다. 이들은 무슬림들이 현대 사회에 적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집단보다 개인을 더 강조하고, 이슬람과 이슬람주의를 구분한다. 양심의 자유를 말한다. 테러를 거부하며 이슬람주의는 이슬람이 아니라고 한다. 계몽된 이슬람을 원하며 급진적 이슬람을 거부한다. 4) 성경의 예수님을 전해야 한다. 꾸란이 이싸(예수님)를 증언한다. 꾸란이 왜곡하여 증언하니 성경적 예수님은 아니다. 그래서 그들의 예수님은 성경의 예수님과는 전혀 다르다. 꾸란의 이싸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 이싸는 여러 사도 중 한 사람이다(꾸란4:171, 5:75, 33:7, 3:49).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꾸란9:30). 이싸는 알라만 경외하라고 가르쳤다(꾸란43:63). 이싸는 종의 한 사람에 불과하다(꾸란43:59). 꾸란은 성경의 예수는 기독교인들이 왜곡한 이미지라 가르친다(꾸란5:13). 당시 무함마드는 신약 27권의 정경화 작업이 그가 첫 계시를 받기 2백여 년 전에 끝났다는 사실을 무시했다. 하지만 꾸란이 복음서나 구약의 토라를 하나님의 계시로 인정하니, 꾸란에서 시작해서 성경의 예수님을 전할 수 있다. 꾸란에 무함마드란 이름이 4번밖에 나오지 않는데 비해, 이싸(예수)의 이름은 25번이나 나온다. 이싸를 긍정한 꾸란의 가르침도 많다. 꾸란3:45-55은 대표적인 예수님 관련구절이다. 이싸가 동정녀에게서 나셨다(꾸란19:19-21). 알라가 이싸에게 인질을 주셨다(꾸란5:46-47, 57:27). 기적적으로 탄생하셨다(꾸란3:59). 들어 올려 지셨다(꾸란19:30-34, 4:158). 다시 오실 것이다(꾸란2:210). 진흙으로 새를 만들고, 맹인이나 문둥이를 고치며, 죽은 자를 소생시키는 등 많은 기적을 행하셨다(꾸란3:49). 하지만 꾸란에 무함마드가 공개적으로 행한 기적은 없다. 그러므로 꾸란을 통해서도 예수님의 삶, 말씀, 성육신, 사랑, 능력에 대해 알려 줄 수 있다. 물론 성경의 예수님을 전하기 위한 징검다리의 역할에 그쳐야 한다. 어쨌든 꾸란이든, 성경이든 무함마드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비교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해야 한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게 해야 한다. 꾸란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게 하는 낙타 전도법(camel method)이 있다. 하지만 꾸란에서 끝나지 말고, 성경의 예수님을 만나게 해야 한다. <저작권자ⓒ합동기독신문 & ikidok.com 무단전재-재배포금지. > BEST 뉴스 위로 목록 댓글 작성을 위해 로그인 해주세요. 등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