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최성관의 수다] “아버지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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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관의 수다] “아버지가 돌아왔다”

기사입력 2020.03.27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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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돌아왔다. 1979년 추석 3일 지난, 108() 아침. 49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2020130() 무성화랑 무공훈장으로 돌아왔다. 그날은 전국장로회연합회 실행위원회에서 인적 쇄신이란 명목으로 나를 내보내려고 처음으로 공식 안건으로 채택한 날이었다. 나는 결국 장로신문 2월 정기이사회와 3월 주주총회를 거쳐 최종 퇴사를 결정했다. 그동안 정말 잘 먹고 잘 놀았다.
 
전국장로회연합회 실행위원회가 한창이었던 그날. 042로 시작하는 한 통의 전화가 내 핸드폰을 울렸다. 전화 너머 한 젊은이가 내 아버지의 이름을 불렀다. 순간! 보이스 피싱을 의심했다. 지난 30년간 외부인이 아버지의 이름을 부른 이가 단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말을 이어갔다. “아버님은 6.25한국전쟁 때 무공을 세웠기에 무성화랑 무공훈장 대상자입니다. 군번도 있습니다. 훈장을 댁으로 보내드릴까요? 부대행사로 전달식을 할까요? 부대 전달식은 시간이 좀 걸립니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알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나는 평소 성격대로 그냥 보내주세요.”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 젊은 병사가 내게 전화한 이유가 있었다. 내 아버지의 부인인 내 어머니와 장남인 내 형님마저도 소천했기에, 내가 그 다음 유족 대표 선순위자이기 때문이었다.
 
내게 전화한 기관은 ‘6.25무공훈장찾아주기조사단이었다. 조사단은 단장 1(대령)15명의 단원으로 구성됐다. 국방부는 2019724‘6.25한국전쟁 무공훈장 수여 등에 관한 법률을 시행하면서 ‘6.25무공훈장찾아주기조사단을 설치하고 20221231일까지 약 36개월 동안 한시적으로 ‘6.25무공훈장 찾아주기 사업을 펼치고 있다. 대상자는 6.25한국전쟁 무공훈장 수훈자 13만여 명 중에서 지금까지 훈장을 받지 못한 56천여 명이다. 국방부는 ‘6.25한국전쟁 당시 전공을 인정받고도 무공훈장을 받지 못한 공로자와 유가족에게 조속히 무공훈장을 수여해서 호국영웅의 명예를 고양하고 예우하여 국가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실시한다고 밝힌 바 있다.
 
무궁훈장 수훈자에 대한 혜택은 크게 세 가지다. 수훈자가 생존할 시 명예수당을 받는다. 아버지의 경우에는 월 37만 원 정도를 받을 수 있었지만, 평생 단 한 푼도 받지 못했다. 그렇다고 명예수당은 유족들에게 승계되지 않는다. 또 보훈병원 진료 혜택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아버지는 1975년 부산 문현동에서 서울 미아리고개로 이사 온 후 투병을 계속했지만 제대로 한 번 진료 한 번 받지 못하고 요절했다. 이제 49세로 일찍 세상을 떠난 아버지에게 남은 유일한 혜택은 국립묘지 안장뿐이다. 그나마 부부가 안장될 수 있어 다행이다. 유족 대표는 한 명만 등록할 수 있다. 내가 소천해야 내 여동생이 유족 대표로 승계된다. 유족 대표 혜택은 보훈병원 진료 할인과 요양 입원 할인 특혜 정도가 주어진다.
 
다음은 이버지의 훈장증 내용이다. “11보병사단 육군 상병 최원출. 군번 0652480” “귀하는 멸공전선에서 제반애로를 극복하고 헌신분투하여 발군의 무공을 세웠으므로 그 애국지성과 빛난 공적을 가상하여 대통령 내훈 제2호에 의거한 국방부장관의 권한에 의하여 다음 훈장(무성화랑 무공훈장)을 수여함” 195464. 2020224일자 위자에 대한 서훈기록에 의하여 본증을 발행함. 국방부장관.
 
아버지가 소속됐던 제11보병사단은 6.25한국전쟁 중이던 1950827일 경북 영천에서 창설됐다. 1951414일 강원도 양양으로 이동하여 설악산지구 전투, 대관령지구 전투, 건봉산지구 전투, 1차 월비산지구 전투를 벌였다. 특히 건봉산지구 전투에서 적 1개 사단을 격퇴시키기도 했다. 1952년에는 351고지 전투, 2차 월비산지구 전투, 간성지구 전투에 참여했다. 19537월에는 북한군이 총력을 투입한 금성전투에서 승리한 직후에 마침내 휴전을 맞았다. 아마도 아버지는 이 금성전투에 참여했다가 복부에 관통상을 입고 후방에서 진료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는 완치 후 부대로 복귀했다가 19551116일 일계급 특진을 받고 하사로 퇴역했다. 일반적인 전역과 퇴역이 다르고, 예비역과 퇴역도 다르다.
 
2월이 채 다 가기 전 어느 날. 드디어! 아버지의 훈장증이 집에 도착했다. 국방부가 보낸 박스 안에는 20171214일 제작된 훈장과 국방부장관의 시계 그리고 국가유공자 등록 안내서가 들어 있었다. 시계는 흰색 바탕이었고, 그 안에는 정예화된 선진강군이란 글씨가 있다. 이때부터 나는 아버지에 대한 말을 많이 하기 시작했다. 그런 아버지를 본 내 아들은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자랑할 것이 하나 생겼다.”며 웃는다. 그동안 나는 아들에게 아들아! 내 아버지는 내게 쓰레기 100톤을 주었다. 그러나 네게만은 쓰레기 1톤도 보내지 않으려고 평생 노력을 했다.”고 말해왔기 때문이다. 아직도 아들은 내 말을 다 이해하는 것 같지 않다.
 
3월 초. 나는 아버지의 병적증명서를 발급받기 위해 서울 대방동 병무청을 찾았다. 병무청은 코로나19’로 인해 정문 입구부터 검역을 강화하고 있었다. 무사히 검역을 통과하고 병무청 민원실 창구에서 아버지의 병적증명서 발급을 신청했다. 그러나 제법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쉽게 발급되지 않았다. 잠시 후 담당직원이 병적증명서에 기재된 아버님의 생년월일과 제적등본에 기록된 생년월일이 다릅니다. 제적등본에 기록된 대로 생년월일을 수정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병적증명서 발급은 어렵습니다.”라고 말했다. 생각지도 못한 일에 옅은 웃음이 났다. “몇 년 차이가 납니까?” “4년 정도 차이가 납니다.” 그랬다. 312아버지는 27으로, 6.25한국전쟁이 한창이었던 19511019일 군에 입대했다가 19551116일 하사로 퇴역했다. 원래 병장으로 전역해야 하는데, 1954년 무성화랑 무공훈장 덕분에 일계급 특진을 받아 하사로 퇴역한 것으로 보인다.
 
왜 아버지는 나이를 속여 입대했을까? 당시 내 할아버지 최영수 44녀를 두었다. 그 중 31아버지는 차남이었다. 27장남을 대신해서 차남이 전장에 나선 것이었다. 당시 장남은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장남 선호사상에 내 아버지가 희생양이 된 것이었다. 그런 아버지의 성향은 내 인생 곳곳에서 나타났다. 나는 평생을 보호받지 못한 과도한 책임감으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27장남인 큰아버지는 6.25한국전쟁이 끝난 후, 1954년에 입대해서 8년을 복무하고 전역했다.
 
나는 어릴 적에 아버지의 복부를 관통한 두 곳의 총상과 오른쪽 귀 윗부분에 총알이 스쳐 간 흔적이 손톱만하게 남아 있는 것을 딱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아버지 30세에 나를 낳으셨다. 그리고 15년 동안 아버지는 나와 우리 가족들에게는 폭군이었기에 가까이 갈 일이 없고 대화를 나눈 적도 거의 없었다. 1975년 우리 식구가 서울로 올라온 지 4년 만에 아버지는 49세로 세상을 등졌다.
 
320. 나는 방배역에 위치한 남부보훈지청을 찾았다. 손에는 훈장증서 원본, 병적증명서, 제적등본, 가족관계증명서 그리고 유족 대표로 내 사진 한 장을 들고. 담당자는 아버지가 호주로 되어 있는 제적등본을 찾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한 번도 호주가 된 적이 없었다. 호적법이 바뀌고 또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 아버지는 호주로 그 이름을 단 한 번도 올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호주는 할아버지 최영수 과 장남 최기출 그리고 그의 장남의 장남으로 호주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도중에 호적법이 변경되자 나는 1992년 결혼 후에야 비로소 호주가 될 수 있었다. 보훈처 직원은 겨우 내 할아버지 최영수 의 차남으로 아버지의 이름을 찾고, 그 아버지의 아들로 내 이름을 발견하고 국가유공자와 유족 대표 등록을 받아주었다.
 
등록을 마치면 부모님의 국립서울현충원 안장을 위해 또 한 번의 서류 준비 전쟁을 치러야 한다. 모두 처음 듣는 이름의 서류였다. 이장신청을 위해서는 제적등본, 병적증명서, 배우자 혼인관계증명서, 배우자의 사망일시 확인 가능한 제작등본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장 당일에는 개장신고필증(개장시), 화장증명서(개장시), 유골반환증(납골당 이장시), 사진 5×7(2)가 필요하다. 어디로 가야 발급받아야 하는지 그리고 누구의 사진이 필요한지 몰라 난감하다. 그래도 하루빨리 국립현충원으로 안장하고 싶다. 안장 기간은 60년이다. 이 시간은 최소한 우리 부부는 물론 내 자녀들이 생존할 충분한 시간이어서 다행이다. 내 아들과 딸 그리고 내 손자들도 내 아버지 최원출 을 기억해 줄 수 있는 충분하기 때문이다. 나는 평생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지우고 싶었던 차남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렇게라도 내 아버지를 기억하고 싶었다. 아버지가 새롭게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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